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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교회 이름에도 ‘한인’을 넣어야 하는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50년 이상 살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한인의 우수성이다. 한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몇몇 단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편 가르기와 차별 대우다. 한인들끼리도 출생지,출신 학교, 학벌, 직업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하거나 차별을 한다. 심지어 목숨 걸고 탈출한 탈북민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심하지 않다는 의미다.     나는 미국에서 50년 이상 의사로 일하면서 인종 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를 찾았던 환자들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를 무시하는 인종 차별적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나는 40여년 전 미시간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며 유대계 백인 의사가 운영하던 병원을 인수했다. 환자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인수 당시 환자의 절반쯤은 잃을 각오도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백인 환자가 늘었다. 열심히 일하는 젊은 의사로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아프리카 출신 흑인 의사가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한다면 환자가 얼마나 찾을까.     지난 50년 동안 내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어느 의대를 졸업했는지 물어보는 환자는 정말이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의사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얼마 전 신문 광고면에서 ‘oo 한인 교회’라는 문구를 봤다. 그동안은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여겼던 문구가 유난히 이날은 거북했다. 그러고 보니 한인 교회 가운데 교회 이름에 ‘한인’이라는 말이 들어간 교회가 꽤 많은 것 같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oo 한국식당’ 처럼 의도적으로 차별성을 강조해야 하는 경우에야 어쩔 수 없지만, 차별을 덮고 하나 됨을 강조해야 하는 종교단체의 이름에 굳이 ‘한인’이라는 이름을 넣어야 하느냐는 생각이다.     요즘 이민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2세들이 점차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녔지만 성장하면 달라진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난 그들에게 ‘한인 교회’라는 이름은 오히려 이질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타인종 친구를 교회에 대려 오기 곤란한 면도 있을 것이다.       만약 한국에 ‘종로 영남인 교회’ ‘용산 호남인 교회’, ‘을지로 서울대 동문 교회’ 등의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있다면 어떤 느낌을 받겠는가. 이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물론 이름을 지을 당시 다른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한인들의 교회’라는 것을 이름에도 나타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세,3세들까지 생각한다면 이제는 다시 고려할 문제라고 본다. 이제는 이름뿐 아니라 교회 분위기도 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오픈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김홍식 / 은퇴의사발언대 교회 이름 한인 교회 교회 이름 교회 분위기

2024-07-24

[글마당] 깻잎 밥

 몇 년째 늦여름마다 행사처럼 이어지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고 나는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무쇠 냄비에 불려 놓은 쌀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깻잎을 가득 채운 후 새우를 넣고 밥을 했다. 밥이 되는 동안 파와 빨간 고추를 다지고 아몬드 가루를 듬뿍 넣은 양념간장을 준비했다.     친구가 해준 된장찌개와 깻잎 김치를 곁들인 깻잎 밥을 먹었다. 우리 부부는 깻잎 향에 빠져 말이 많아졌다.     “프랑스 유명한 주방장이 한국에 와서 깻잎 향에 반했다는군.”   남편의 기분이 좋은 틈을 놓칠세라 나는 “내일 또 깻잎 밥과 깻잎부침개 해도 돼? 싱싱할 때 다 먹어 치워야지.”   친구는 빨간 고추, 방울토마토와 호박도 줬다. 깜박 잊고 호박잎과 배를 주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카톡이 왔다.     정확히 31년 전이다. 내가 작은 아이를 낳고 바로였다. 우리는 플러싱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만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끌려 친구가 되었다. 교인 모두가 집사였는데 우리 둘만 집사가 아니라서 ‘안 집사’라고 불려서였을까?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다툼이라던가 섭섭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배려 때문이다. 친구는 작은 거인이다. 키는 작지만, 마음 씀씀이는 그야말로 그녀 집 가까이에 있는 대서양을 닮았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그녀의 집 뒤뜰에 나가서 깻잎 따려면 모기에 물리지 않게 무장을 해야 한다. 내가 모기에 물릴 것이 걱정되어 아예 뒤뜰 나가는 방에다 깻잎 줄기를 통째 잘라다 쌓아 놓았다. 나는 방석에 앉아 조용히 깻잎을 따며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항상 내가 힘들지 않게 배려한다. 그러면 나는 어떤 배려를 그녀에게 했던가? 기억이 없다. 그녀에게 받은 기억만 있다.   우리는 각자 두 아이를 키우며 잘살아 보려고 산전수전 공중전을 하면서 이따금 만남을 이어왔다. 이제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서 예전보다 더 자주 만난다. 나는 수다를 떨고 친구는 내 수다를 마냥 들어준다. 다음 만남에는 수다를 꾹 참고 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텐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이 엿 같은 코로나 역질 때문에 2년 가까이 입을 열 때가 없어서일까? 라고 변명하려다가 솔직히 나는 타고난 수다쟁이라고 인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성당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문이 열려있으면 항상 들어가 기도하며 쉬었다 나온다. 그녀와 헤어지기 전, 그녀가 다니는 교회에 들렀다. 작고 아담한 하얀 교회다. 순수하고 아늑한 교회 분위기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은 포근했다. 우리는 각자 조용히 기도했다. 이수임 화가·맨해튼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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